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맨해튼 계획 (문단 편집) === 일본 제국의 항복 === 2차 대전 당시 압도적인 연합군의 전력과 그로 인한 연이은 패배, 경제 및 플랜트의 붕괴로 인해 전쟁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1%도 남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제국은 [[1억 옥쇄|1억 총옥쇄]], [[반자이 어택]], [[카미카제]] 등 발악에 가까운 무의미한 항전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려 2번이나 실시된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원자폭탄 투하]]를 통해 힘의 차이를 뼈저리게 느낀 일본제국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일본의 항복이라는 미국의 선전에만 가려졌으나 후대에 관련 기밀 문서들이 공개되면서 당시 미국 정부가 큰 비판을 받게되었다. 결론은 일본은 히로시마 원폭으로 사실상 전의를 상실하고 항복을 결정하게 된다. 다만 무조건 항복을 두고 일본 정부 내에 이견이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당시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자 급해진 미국 정부는 자신들이 전쟁을 끝내고자[* 이는 미국이 독일 점령 때 소련한테 베를린 입성을 뺏긴 것도 영향을 미쳤다.] 나가사키에 2차 원폭을 감행한 것으로 밝혀졌다. 또 맨해튼 계획 책임자인 오펜하이머를 비롯한 상당수 과학자들은 2차 원폭에는 강하게 반대했다고 한다.[* 다만 이 부분은 미합중국 정부에 대한 부당한 비판이라 할 수 있는데 다 끝난 뒤에야 일본이 전의를 잃었느니 마느니 하지만 당시 미국이 일본 수뇌부의 생각을 알고 있을 리가 없으므로 일본이 아직 핵이고 뭐고 몇 번을 맞아도 항복할 생각이 없었는지 아니면 패닉에 빠져 항복을 논의하고 있었는지를 알 방법 자체가 없었다. 게다가 소련의 대일 선전포고는 다름아닌 미국과 소련이 정상회담을 통해 세부 날짜까지 상호 합의한 사항으로, 소련의 선전포고가 미국을 급박하게 만들었다는 주장은 일부의 주장일 뿐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이로 인해 맨해튼 계획에 참여했던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연구에 회의감을 가지게 된다. 실제로 히로시마 원폭이 성공하는 모습을 보고 과학자들은 환호성을 지르고 파티를 열었다고 한다. 그러나 히로시마 원폭 현장 조사 결과가 알려지고 2차 원폭이 감행되고는 파티도 일부 소수만 조촐하게 가졌다고 한다. 반대 입장이던 과학자들은 이 위험한 폭탄에 대해 전세계에 알려야 한다고 정부에 강력히 건의했다. 이렇게 핵개발에 관여한 맨하튼 프로젝트의 과학자 중에는 죄책감에 시달린 사람들도 있으나, [[존 폰 노이만]], [[한스 베테]], [[엔리코 페르미]], [[리처드 파인만]] 등은 원폭투하에 대해 '''[[필요악|더 많은 인명 피해를 막기 위해 한 일]]'''이라고 평가하였다. 이는 당시 미국의 여론이 자신들을 직접적으로 침략하지는 않아서 어느 정도는 불구경하듯 봤던 독일과 달리 민간인도 있는 진주만을 기습 침공한 일본에 대한 분노가 매우 컸던 원인도 있다. 그래서 독일의 [[드레스덴 폭격]]에서는 반인륜적인 행위라며 여론의 맹비난을 받았지만 [[도쿄 대공습]]이나 맨해튼 같은 일본을 향한 공격에서는 국민적 지지를 받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